서울여행 중에 궁여행을 빼놓을 수가 없다. 창경궁은 야간개방이 21시까지이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야간에 창경궁과 창덕궁을 거닐면 운치 있고 좋을듯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로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궁궐 복원에 따라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도 불렸으며 종묘와도 연결돼 있다.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다른 동향 배치로 왕실의 별궁으로 쓰였다. 그리고 인터넷 예매를 통해 한정적인 기간에만 야간관람을 할 수 있었으나, 2019년부터는 항상 야간개방으로 변경됨에 따라 한정된 인원의 야간관람과 예매 열풍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게 됐다.
창경궁 기본정보
- 위치 :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창경궁
- 입장시간 : 매표 및 입장시간 9시부터 20시까지 관람시간 9시부터 21시까지이다. 창덕궁 연계관람 시 매표시간은 11월에서 1월은 9시부터 16시 30분까지 6월에서 8월은 9시부터 17시 30분, 2월에서 5월, 9월과 10월은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 입장요금 : 1,000원, 10인이상시 800원
- 주차 : 전용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창경궁의 역사
태종(조선)이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에 여기로 거처를 옮겼고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했다. 단종도 수양대군에게 양위 후 여기로 옮겼다가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쫓겨난다. 성종 15년(1484)에 마침내 할머니 자성 왕대비 윤 씨, 어머니 인수대비 한 씨, 숙모[4] 인혜대비 한 씨를 모시려 확장해 붙인 이름이 바로 창경궁이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 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해 이듬해 11월 마무리됐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됐다. 창경궁은 인조(조선)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있었다.
이후 조선 왕조가 기울고 순종(조선) 즉위 후 급속히 변형돼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1909년 일제가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전각들을 헐고, 일본식 건물을 세워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등 유원지로 조성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해 건설이 미뤄져 순종 사망 후인 1932년에 도로가 났다. 해당 도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9년 종묘 복원 계획을 세우고 박원순 시장이 이어받아 2022년 완공을 봤다. 이것이 바로 율곡터널이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31일 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시켜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됐다.
고의적인 훼손
본궁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경궁은 엄연한 궁궐이고, 또한 단순한 지방의 행궁이 아닌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서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하던 곳이다. 왕조와 왕가에 있어서 궁궐이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궁궐이 왕가에게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유원지로 개조할 생각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를 보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도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하여 대중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심지에서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즉각적으로 공원을 조성시킬 수 있고, 또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시키고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해외에 일본이 대한제국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과 위와 같은 실제 의도들로 인해 창경궁의 개조를 단행한 것으며, 순종이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의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근대건축도면집에 실린 1907년 창경궁 도면을 보면, 일본은 건물 몇 개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창경궁 전부를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이었고, 왕실의 개인 정원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1909년 11월 창경궁에 박물관까지 완공을 하자마자 창경궁을 일반 대중에 공개해 버렸고, 조선총독부는 거듭할수록 기존의 전각들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개조하며 '궁궐의 유원지화'를 심화시켰으며 더욱이 순종이 명시적으로 반대한 부분들(창경궁과 종묘의 연결로 파괴 등)에 대해서도 개조를 강행하는 등 애초부터 창경궁의 개조는 순종의 의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순종은 어느 정도 창경궁에 식물관과 동물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꼭두각시 황제인 순종 입장에서는 반대를 하기도 어렵거니와 궁궐에 무료로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을 지어주겠다는데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순종 본인만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훗날의 창경궁 복원을 나쁘게만 보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창경궁으로의 복원 이후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고,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족 단위 나들이 장소로 시민들에게 가장 각광받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잔재이므로 궁궐로 복원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에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원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복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 사료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놀이기구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거의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1단계(2015년 ~ 2021년)및 2단계(장기 계획)에 걸쳐 창경궁을 원형 복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 덕수궁과 경복궁 또한 동시에 정비되고 있는 만큼 예산 부담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지상 보행길 복원에 들어가 율곡로는 지하 터널로 이어지고 지상에는 담장과 보행길이 함께 조성될 예정이다. 기사 2019년 1월 1일부로 덕수궁과 마찬가지로 상시 야간개장으로 관람 가능하다.
경복궁보다도 긴 세월이 깃든 궁궐 창덕궁
경복궁이 한양 5대 고궁 중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정도로는 특출 나게 압도적인 탓에, 역사성까지 나머지 궁궐들도 압도한다는 오해가 흔하나, 사실 경복궁의 역사는 창덕궁보다 훨씬 짧은 편이다.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갑절이 넘는 시기 동안 왕의 주요 궁궐(편의상 '정궁')의 지위를 유지한 반면, 상기했듯이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흥선대원군이 재건하기까지 275년 간은 터만 남아있던 궁궐이기에, 조선왕조 500년간 경복궁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시기는 불과 150년 안팎뿐이다. 즉 경복궁은 조선 전기와 고종 시기에만 궁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반면에 창덕궁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망국까지 계속 원형 그대로 존속했던 유일한 궁궐이다.
그런데도 대중들의 인식은 다소 박한 편이다.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접근성이 비교적 뒤지는 것도 한몫한다. 실제로 경복궁 인근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광장 등 중요 시설과 인접해 있는 데다가,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데 반해서, 창덕궁은 인접한 다른 주요 시설도 없고 안국역에서 좀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궁궐 덕후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궁 맛을 제대로 보려면 경복궁보단 창덕궁, 창경궁에 가라'라고 권하기도 한다. 경복궁의 인파를 꺼리는 이들한테도 상대적으로 한산한 창덕궁이나 창경궁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
창덕궁 후원 창덕궁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이라이트는 궁 북쪽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後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이 정원의 명칭은 '후원'이 가장 많고 이외에도 '금원(禁苑)', '북원(北苑)' 등이 있다. '금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원의 이름을 두고 갑론을박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祕苑)'이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정원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창덕궁 관련 문건에도 후원을 칭하는 명칭은 비원(Piwon, the Secret garden)이라고 표기돼 있다. 일각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궁궐의 격을 낮추고 특히 창덕궁 후원을 낮춰 부르기 위해 비원이라고 명명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제가 비원이라는 이름을 부르도록 강요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다. 그래도 오래전부터 정사에 등장하는 명칭이 후원인만큼 비원보다는 창덕궁 후원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비원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근거로는 대한제국기의 법령을 모아 발간한 "법규유편" 제1권 관직항목에 창덕궁후원을 "비원"이라고 칭하고, 비원을 관리할 관리의 직책과 인원을 규정하였었다. 해당 법규유편은 대법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대법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국역하여 무료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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